일본 땅에서 지켜 온 한글, 나의이름........최우영
일본 땅에서 지켜 온 한글, 나의이름........최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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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6.1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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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에겐 ‘민족말살정책’이란 단어가 조금 낯설 수도 있지만,

: 조아(JOA)

일본 땅에서 지켜 온 한글, 나의이름........최우영

2018년 온빛 사진상을 수상한 최우영, 우해미, 권학봉, 박창환, 신락선의 사진전이 전남 광주에 있는 갤러리 혜윰에서 2019 514일부터 69일까지 열린다. 최우영은 <나의 이름> 작업으로 최우수상을 받아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최우영 프로필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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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제6회 대한민국국제포토페스티벌 특별전에도 최우영의 <나의 이름> 작품이 초대 되어 525일부터 30일까지 만나 볼 수 있다.

최우영은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디자인 전공으로 졸업을 한 뒤 본격적으로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2014<잊혀진 이웃>, 2016<은유의 시간> 등으로 총 5회의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그리고 2019<온빛 사진상 수상자전> 2014<우리시대의 빛>, 2003<한일현대미술교류전> 등의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8년에는 <나의 이름> 작업으로 온빛 사진 상을 수상했으며, 2010 인권 사진상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받기도 했다.

 

이번 최우영의 사진, <나의 이름>은 일본 땅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딱지를 붙여도 결코 한글이름을 버리지 않고 힘겹게 지켜온 재일동포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업이다. 그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사회적인 메시지로서 사진적인 힘과 그 역할에 대한 무게감을 드러낸다.

 

젊은 세대에겐 민족말살정책이란 단어가 조금 낯설 수도 있지만, 1930년대 일본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시키기 위한 식민지 지배정책이다. 그들은 한글 교육을 금지 했을 뿐 아니라,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한글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학교나 회사에도 다닐 수 없었다. 당시에는 한글 이름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살을 선택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일본 본토 학교에서도 조선어 과목을 없애거나 한국말을 사용하면 어린 아이들까지 체벌을 가했다. 이름을 바꾸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딱지를 붙여 엄청난 불이익을 주거나 많은 제약을 줬기에 일본땅에서 한글 이름을 지켜 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를 격어 온 재일동포들은 자신의 한글 이름을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도 대를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우영은 어떻게 이와 같은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에겐 아픈 가족사가 있다. 월남전의 파월장병이었던 아버지는 미군이 뿌린 고엽제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인이 될 때까지 친할아버지에 대한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도 들어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직장을 자주 옮겨 다녔고 집안 형편도 몹시 어려웠는데 그 이유를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바로 연좌제 때문이었다. 사실, 할아버지는 일본에 살아 계셨고, 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지금도 아는바가 별로 없다. 조총련동포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오셨을 때 그날 하루, 단 몇 시간 동안 할아버지를 보게 되었고 이 모습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와 몇몇 곳의 교포들을 만나게 되면서 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고 돌아가시기 전에 사셨던 곳도 처음 가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재일교포들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기록해야겠다는 다짐을 더욱 굳혔다. 촬영은 캐논의 1DS MIII24-70mm 2.8L 렌즈를 사용했다. 배터리 방식의 프로포토 B1 2개의 조명을 TTL 리모트컨트롤 방식으로 제어하며 모델 양쪽에 스탠드를 세워 촬영했다. 조리개는 최소 F8이상, 삼각대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흔들림 방지를 위해 셔터속도는 최소 1/50 이상으로 놓고 촬영하였다.

사진에 등장하는 고정범 교장 선생님은 매우 특별한 인연이다. 시코쿠 지역에 있는 유일한 시코쿠 조선 초중급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신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직접 낭독하셨던 분이다. 고마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최우영 작가에게 할아버지가 이 지역에 사셨다고 말해줘 알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또 다른 사진은 조선학교 교복인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있는 김사영의 사진이다. 히로시마 조선고급학교 학생이다. 일본에서 이 교복을 입고 등교하면 테러가 자주 있어 아직도 등하교시에는 일반 학교 교복으로 갈아입고 다니는 실정이다. 일본에서 민족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것이 촬영 하는 내내 최우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진 속 로화자 선생님은 조선학교 교원이다. 오노미치라는 일본 소도시의 작은 공네 골목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이곳은 과거에 많은 동포들이 모여 살던 지역으로 민족교육이 시작된 의미 있는 곳이다. 대부분의 민족학교 선생님들은 일본정부에서 학력 인정이나 보조금을 지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월급도 최저임금 수준이지만 조선학교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살아간다.

일본에는 일제 강점기에 끌려와 살게 된 사람도 있지만 다양한 사연으로 어쩔 수 없이 살면서 세대를 이어온 재일동포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들은 긴 세월 온갖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우리의 언어를 지키는 것만이 민족성을 잃지 않는 것이라 다짐하며 살아 왔다. 이들을 위해 최우영이 사진가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의 이름> 작업을 시작해 알리고 있다.

사진을 촘촘히 다시 들여다보자, 그들이 세대를 이어오면서 힘겹게 지켜 온 한글 이름이 적힌 하얀 도화지를 가슴에 앉고 활짝 웃고 있다. 최우영이 사진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 옆집에 살고 있는 평범한 이웃들처럼, 너무나 친근하다. 분명 이들은 우리의 동포이며, 근현대사와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쳐 온갖 탄압과 박해 속에서 민족혼을 잃지 않고 살아온 역사의 증인들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할 일은 없는지 이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먼저, 전시를 축하한다. 이번에 전시하게 된 <나의 이름>은 어떻게 해서 진행하게 되었나.

원래는 출판을 염두에 두고 인터뷰를 진행할 필자를 섭외해 인터뷰 때 제가 사진과 기록용 영상을 맡아 진행하려고 생각했었던 작업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일을 나누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했었는데 필자와의 의견이 조금 달라 저 혼자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현지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현장의 느낌을 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뭔가 이미지마다의 큰 임팩트는 없을지 모르지만 동포들을 카메라 속에 담아온 이미지들이 모인다면 큰 덩어리가 되어 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조금 더 잘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유형학적인 느낌으로 작업을 진행한 것도 이러한 의도가 담겨있기도 하구요. 그저 옆집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이웃 같은 재일동포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이름>과 더불어 번외로 자신의 바람과 한국의 동포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하나씩 번외로 부탁해서 총 두 가지의 이미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나의 이름>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자신의 이름과 국적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 많은 재일교포들이 지금도 지키고 있는 자신의 한글 이름, <나의 이름>작업을 통하여 재일교포들이 여전히 일본에서 우리와 같은 동포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을 기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재일동포들이 일본의 여러 공간들과 살아가는 장소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키며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는 주제의 작업입니다. 본인이 쓴 자신의 이름과 동포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등 두 개의 이미지로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나의 이름> 작업을 하면서 사용한 촬영 장비와 촬영방법에 대해 궁금하다.

본격적으로 작업하며 주로 사용하던 카메라는 핫셀블라드 903SWC입니다. 당시 셔터스피드 확보와 함께 입자감을 살리기 위해 Kodak TRI-X 400 흑백필름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903SWC로 촬영한 사진으로 핫셀블라드 사진콘테스트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하고서 받게된 503CW 카메라세트로도 많은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첫 개인전을 준비할때는 대형작업으로 옮겨갔는데요. 확대 인화시의 이미지 선예도를 고려하여 정말 무거웠던 4x5판형의 카메라 SINAR P2와 해상도가 좋고 이미지 서클이 큰 Super-Angulon 72mm렌즈를 메인장비로 사용하며 무거운 장비를 지탱하기 위해 무거운 삼각대까지 짊어지고서 뉴타운과 재개발 지역의 건물들을 오르락 내리락, 들락날락 하며 누비고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한 무게가 아닐 수 없네요. 필름은 당시 네거티브 필름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도시의 다양한 색감과 현장감, 관용도가 좋은 Kodak 160NC 필름을 부드러운 색감, 노출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작업이 실내와 실외를 함께 하나의 이미지안에 촬영하는 작업이었기에 네거티브 필름을 선택했는데 색감을 잡기가 힘들지만 색의 레퍼런스만 제대로 잡아놓으면 포지티브 필름보다 관용도면에서 유리하기에 자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쉬운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필름장비는 조금 가벼운 장비로 내려와 위스타SP 필드카메라와 중형백을 사용하고 디지털장비는 Canon 5DsR, Sony A7R3등의 카메라와 단렌즈군 위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조명은 ProfotoB1B10을 주력으로 병행하며 쓰고 있습니다.

주제를 잘 드러내기 위해 작가가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가.

이번 작업은 한 장의 이미지 개체보다는 작업전체를 하나의 큰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나의 이름>이라는 주제 속에서 여러 사람, 각기 다른 이름의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일관된 화각과 유형학적인 스타일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지요. ‘강하되 차분할 것, 분명하고 상징적일 것같은 신즉물주의, 신표현주의적 개념처럼 재일동포 모델과 일본현지의 배경으로 드러나는 디테일 등으로 현실감을 강조해 주제와 대상을 실체화하여 관객이 공감을 느낄 수 있게 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이미지 속에 정치와 역사,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일정 거리, 일정 앵글, 일정 방향을 견지하면서 형성된 이미지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 더 확고하게 부각하고자 하였습니다. 매우 전형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 듯 하면서도 각자의 인물들의 이름과 성별, 나이는 모두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 각자의 모델들은 한편으로는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장소와 모델, 그 모델이 전하고자 하는 텍스트를 하나의 이미지에 담으려 했습니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의 형식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작업은 모두 일본에서 제작되었다. 작업을 진행 하는 과정에서 어려움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재일동포들을 만나고 작업 할 때의 분위기가 남과 북의 상황이 엄중한 시기이다보니 발언이나 행동도 조금은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쉽게 방문이 허락되지 않는 조선학교를 방문하는 것도 특별히 허락된 일이기에 당시 정치적 상황이나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요. 오히려 저보다 동포 분들이 이렇게 다니는게 괜찮은지 걱정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남북 상황은 그러했지만 실제로 현지에서 만나는 동포들은 남북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정말 따뜻하게 저를 맞아주었고 남과 북 사이에 있는 재일동포들이야 말로 통일을 위한 다리가 되어줄 수 있는 소중한 동포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불어 작업을 하면서 괜히 오해를 사거나 현지 일본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습니다. 도심 한가운데서 한국어 이름이 적힌 글을 들고 조명을 터뜨리며 촬영하는 작업이라 괜한 시비가 붙지 않도록 말이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재일동포들은 일본 현지에서는 소수이고 여전히 다양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더더욱 일본에서도 한글이름을 지키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많은 동포들이 밝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무거운 주제일수도 있지만 실제 사진 상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이들이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지켜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요. 그런데 특별히 제가 주문하지 않아도 제가 만난 이들 모두가 밝고 당당하게 직접 쓴 자신의 이름을 들고 한국에서 온 사진가 앞에 서 주었습니다. 제가 그런 동포들에게 더 고마웠습니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을 것 같다.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평화공원 그라운드 제로에서 만나 촬영을 했던 리실근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처음 제가 그분을 만난 곳은 히로시마의 한 요양원이었습니다. 재일동포 1세대로 재일조선인 피폭자연락협의회 회장님이신데 서울에서 온 저를 무척 반겨주시며 두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이 떨어졌을 때 선생님의 나이는 16살이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원폭투하 때 현장에는 안 계셔서 생명은 건지셨지만 이후 지금까지 방사능 피폭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히로시마 평화공원까지 부축을 받으시며 본인의 이름을 직접 쓰셔서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공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선생님을 사진으로 남기려하자 자리를 잠시 피해주셔서 원폭돔 앞에서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습니다. "조국과 민족은 나의 생명이다. 값있게 살자!"이 말씀을 한국 가서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사영 학생이 기억납니다. 히로시마 조선고급학교 학생인데 입고 있는 치마저고리는 조선학교의 교복입니다. 일본에서 이 치마저고리에 대한 테러들이 빈번하게 일어나서 등하교시에는 일반교복으로 갈아입고 간다고 합니다. 이 사진을 찍었던 장소는 히로시마역 근교인데 촬영 할 때도 코트로 치마저고리를 가리고 여기까지 와서 촬영을 했습니다. 그만큼 일본에서 민족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아무튼 촬영에 협조 해 주신 모든 분들을 잊을 수가 없고 지금까지도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나의 이름>, 다큐멘터리 작업을 통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기대 한다면.

이들 중에는 대한민국 국적과 일본국적, 지금은 사라진 '조선'이라는 분류를 한 일본 법률상 무국적으로 간주하는 조선적(朝鮮籍)을 가진 재일동포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가 끝나고서 일본에 남아있던 동포들은 남북으로 나뉘어 혼란스러운 정국에 휩싸인 본국으로부터 국가적 관심이나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민족의 문화와 언어, 역사를 지키는 것만이 일본에서 민족혼을 잃지 않는 길임을 깨닫고 자구적으로 민족의 역사교육을 가장 중요한 교육사관으로 온 힘을 다해왔어요. 일본 정부의 갖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 민족혼을 잃지 않고 살아온 이들 또한 지나온 근현대사,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시간의 터널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반()일본인으로 대접받고, 북한과 연결되어 있다는 색안경 낀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는 그들이 우리의 동포임을 잊지 않고, 따뜻하게 같은 동포의 시선으로 바라봐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누구보다 통일된 하나의 조국을 꿈꾸는 그들과 손을 맞잡고 하나 된 조국을 꿈꾸고 싶습니다. 한국과 북한 모두를 품에 안고 있는 그들 또한 통일 조국의 다리를 이을 수 있는 징검다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사진 작업 방향이나 활동 계획이 궁금하다.

사회적 의미가 담겨있는 공간과 건축물, 삶의 풍경과 사람들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미지를 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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