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효용 개인전 리틀 포레스트 2
엄효용 개인전 리틀 포레스트 2
  • 황임규 기자
  • 승인 2019.06.14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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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 2019. 7. 11(목) ~ 7. 23(화)
▪오 프 닝 : 2019. 7. 11(목) PM 5:30
▪관람시간 : 평일 AM 10:00 ~ PM 7:00 (토요일 PM 6:00,일요일휴무)
▪전시장소 : 반도갤러리 (서울 중구 삼일대로 4길 16 반도빌딩 2층)
▪연 락 처 : 02-2263-0405

엄효용의 나무는 한 그루의 나무인 동시에, 수 백 개 혹은 천 그루 이상의 나무들의 세계다. 엄효용은 가로수들을 수백 번씩 반복 촬영하고 그 사진들을 겹쳐놓는 반복적 작업을 통해 나무들의 시간성과 복합성, 입체적인 삶들을 켜켜이 한 장에 담아낸다.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나무들은 그렇게 엄효용의 독특한 재현 방식을 통해 특별한 시각적 경험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는 그 나무들이 다시 숲이 되고, 그 숲이 계절과 만나 변모하는 과정을 새롭게 선보인다.

무한한 시간성으로 다가오는 이미지의 숲들은 어쩌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하루하루의 편린 같은 일상들일 것이다. 엄효용은 이 숲들을 응시하게 만들고, 잠시 우리를 숙고하게 만든다.

 

경포로 벚나무 봄, 2019,Pigment Print on Cotton Paper,100x162cm 복사
경포로 벚나무 봄, 2019,Pigment Print on Cotton Paper,100x162cm

 

중첩된 이미지 숲을 탐문하는 이유

육상수 / 우드플래닛 대표

한 사람의 몸에는 몇 개의 자아가 존재할까? 공적인, 개인적인, 사적인 혹은 규정할 수 없는 또 다른 것일 수 있다. 여러 개의 자아는 중첩과 분할을 거듭하면서 마치 칼집의 칼을 꺼내들 듯 상황에 대처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 대해알다가도 모르겠다는모호함으로 궁색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상대는 둔갑술로 우리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로만 설명이 안되는, 팍팍한 삶의 조건과 대처법이 몇 개의 자신으로 내밀어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하나가 아닌 것에 하나로만 인식하려는 타자의 안이한 욕망과 편리함이 다양한 정체성, 자아를 구속하는 게 아닐까.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대전제는 동서고금의 화두다. 진짜를 밝히려는 인간의 부단함은 지칠 줄 모른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대신할 때 우리는 실존(實存)’이라 말하기도 한다. 본질, 진짜, 실존을 정의하고자 하는 이 지속성은 결국 사진가 엄효용 에게까지 이르렀다. 무던히 차창 밖으로 흐르는 나무의 형상이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들이 닥 친 것이다. 작은 화분을 모으는 취미 생활에 그치지 못한 그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나무의 이면적 이미지네이션을 규명하게 된 것이다.

 

그의 사진은 의도했건 안 했건, 분명히 나무 그 이상의 나무 혹은 숲을 이뤘다. 100장에서부터 200장에 이르는 사진을 한 프레임에 중첩함으로써 나무의 생물학적 속성을 넘어 고도의 회화성으로 치환 시켰다. 도로 가장자리에서 단상으로 존재하던 나무는 너무 평범하고 익숙한 모습이어서 우리의 관심에서 쉬 멀어질 수밖에 없을 텐데 수십, 수백 그루를 한 그루에 묶어두니 저건 뭐지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작가는 이 사진들을 작업하면서 논리적 의도보다는 정교한 촬영과 후속 컴퓨터 작업을 통해

자신의 작은 숲(리틀 포레스트)을 만들고자 했다. 그 숲은 도시를 중심축으로 자신만의 정원을만드는 과정이었다. 집 안의 작은 화분으로는 감정이입이 어려웠을 것이다. 진짜 숲보다 더 완고한 숲의 정원을 마음에 심고자 했다. 어쩌면 사진가로서 표현의 갈증을 넘어 삶의 중심을 다시 세우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예술이 자신을 깨우치는 결과물의 흔적인 것처럼, 다중의 자아가 아닌 궁극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의 안내판처럼 엄효용의 사진은 단단하게 서 있다.

현재 그를 찾아 온 도시의 숲 이미지는 불안한 실존의 종착지가 될 수 없다. 예술은 문제점

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영혼을 치유하지는 못한다. 사진가로 살아가는 엄효용에게 오늘의 사진은 완성한 자아도 실존도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계속될 것이고 여러 개의 자아처럼 그만큼의 숲을 만드는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언젠가 그의 손에서 카메라가 사라지고 자신의 눈과 마음이 하나 되어 그리는 숲이야말로 진정 그가 이루려는 숲이다. 그 숲에 가기 전에 그가 가꾼 형형색색의 숲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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