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민 사진_설치전 ‘THE TEXT 1’
오철민 사진_설치전 ‘THE TEXT 1’
  • 박미애 취재국장
  • 승인 2019.08.15 1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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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쓰다와 읽다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일 고찰
일시; 2019.8.9.(금) - 8월18일(일)
장소; 잇다스페이스(인천 중구 참외전로 172-41/11시-6시/월 휴관)
오프닝; 8월10일(토) 5시

인천의 잇다스페이스에서 이달 18일까지 오철민 사진_설치전 THE TEXT 1이 열린다. 오철민은 사진을 기반으로 텍스트와 회화를 결합한 사진과 오브제, 설치작업으로 톡특한 작업을 내놓았다. 그는 작품에 텅빈 공간을 의도적으로 배치해서 관객의 의미부여를 통해 작품의 의미가 완성되는 전시를 의도하고 있다.

1-Oh Cheolmin_철망물고기_혼합재료_80X60X60cm_2019
1-Oh Cheolmin_철망물고기_혼합재료_80X60X60cm_2019
2-Oh Cheolmin_찢은얼굴들고있는_Digital Inkjet Print on Matte__90x90cm-2018
2-Oh Cheolmin_찢은얼굴들고있는_Digital Inkjet Print on Matte__90x90cm-2018
3-Oh Cheolmin_은미#056_혼합재료_각 29.7X21cm_2019
3-Oh Cheolmin_은미#056_혼합재료_각 29.7X21cm_2019

작가노트

 

순수한 인덱스라고 불리는 자동생성의 과정을 가지는 사진은 애초에 코드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완전한 해독이 불가능한 기호다.

나는 변덕스럽게 바뀌는 내 감정과 느낌을 사진이라는 매체에 매이지 않고 풀어놓은 가장 사진적인 이번 작업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굳이 설명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결국 사진적 노에마라는 거짓 아우라로 말하기를 대신하는 텅 빈 무엇이기 때문이다.

작가란 호수에 돌을 던지고,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넣는 역할을 할 뿐이다. 어떤 파동이 그려지고 무엇이 두레박에 담겨 올라올지는 관객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모호한 피사체와 오브제로 던진 나의 질문에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담았는지에 관해 관객인 당신이 얘기 할 차례다.

의미가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대해 한동안 고민했다. 전통적으로 작가는 의미의 유일한 생산자, 수용자는 그 의미를 전달받는 역할이었다. 불과 50-60년 전에 작가는 필사자에 불과하고 의미의 완성과 재생산은 독자의 역할이라는 정의가 바르트, 푸코, 움베르트 에코, 볼프강 이저, 크리스테바 등에 의해 있었다. 안타깝게도 작가와 수용자 관계에 대한 연구는 문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사진에 관해서는 바르트의 푼크툼이 겨우 얘기될 정도로 미흡했다.

 

나는 3편으로 계획한 <THE TEXT>시리즈를 통해 앞서 언급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연구가 사진을 중심으로 한 시각매체에서는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일 것이다. 이번 THE TEXT 1 1,2,3으로 구성될 <THE TEXT 시리즈>의 첫 번째 전시다. <THE TEXT 시리즈>쓰다와 읽다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일 고찰’, ‘연구’, ‘제안의 부제가 각각 붙고 내 고민의 진행을 전시로 말할 것이다.

 

오철민의 작업

은미라는 이름의 텍스트 쓰기 혹은 읽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내가 사랑하고,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어떤 장소에 고정되지 않은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특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러 온 유일한, 독특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상투적인 것(타인들의 진실)에도 포함될 수 없는 내 진실의 형상이다(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동시에 그는 사람이고, 유일하고 독특한 이미지고, 진실의 형상이다(그리고 바르트 식으로 텍스트고, 사진으로 치자면 기호다). 어쩜 유일하고 독특한 이미지도 진실의 형상도 알고 보면 다름 아닌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로부터 발생한 것이기에, 그가 불러온 것이기에 의미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의미는 결코 상투적인 것, 타인들의 진실, 독사(doxa) 그러므로 상식과 합리로 환원되지가 않는다. 내 진실의 형상이 타인들의 진실로 환치되지가 않는다. 그러므로 진실도, 의미도, 고독도, 그리고 향유마저도 공유할 수는 없는, 개인적인 층위에서만 일어나는 일일 뿐. 오철민의 작업은 사진을 매개로 이처럼 공유할 수 없는, 다만 개인적인 층위에서만 일어나는 진실, 의미, 고독, 그리고 향유를 더듬어 찾는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다. 이 모든 일들이 파생했을 다름 아닌 바로 그를 찾아 헤맨다. 그는 누구인가(아님 무엇인가).

 

빙의와 영매. 오철민은 대학 졸업 후 <미디어 오늘>에 사진부 기자로 입사해 4년을 근무했다. 당시 보도사진과는 별도로 개인 작업을 했다. 사실상의 첫 개인 작업인 셈이다. 굿에 대한 관심으로 빙의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수행했다. 빙의란 죽은 자가 산 자의 몸을 빌려 현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산 자는 말할 것도 없이 무당이다. 그러므로 무당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매개하는, 신과 인간을 중재하는 영매다. 세부적인 차이를 도외시한다면, 예술이 그렇고 예술가가 그렇다. 관념적 실재와 감각적 실재를 매개하는 것이며, 감각적 현실을 매개로 영적 존재 혹은 차원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 보이스는 스스로를 무당으로 정의할 수가 있었다. 이로써 작가는 어쩜 예술이 갖는 영적 환기력을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빈방 1. 원래 2010년에 처음 제작된 이후, 2018년과 2019년에 연이어 발표한 작업이다. 여기에 무당의 빙의를 다룬 작업에 나타난 영적 환기력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 현실과 만나지는 점도 주목해볼 부분이다. 표면적인 경우로만 치자면 재개발현장을 테마로 한 것이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다룬 작업이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는 경제제일주의원칙과 효율성극대화의법칙에 의해 견인된다. 그런 만큼 경제성이며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변방으로 밀려나는데, 지극한 금기로서 죽음이, 그리고 흥미롭게도 예술이 지목된다. 그렇게 변방으로 처리된 것들을 조르주 바타이유는 잉여(잉여인간?)라고 부른다. 작가는 아마도 무분별한 개발논리와 재개발현장이 바로 이런 잉여를 생산한다고 본 것이다.

작가는 철거 중인 재개발현장을 찾고, 주인 없는 빈 방을 어슬렁거린다. 경황없는 이주와 갑작스런 퇴거 통고로 황망했을 사람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들이 되는대로 뒹굴고 있는 방안에서 작가는 몇 안 되는 그 물건들에 의지해 한때 그 방의 주인이었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고, 고이 간직하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상실한 꿈을, 어쩜 자기와 무관하게 산산 조각났을 소망을 대신 실현시켜준다.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부재하는 사람들과 미래의 관객을 매개하는 영매가 된다. 그리고 사진은 그 빙의현상(이번엔 사람이 아닌 사물 속으로 뛰어드는)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매체가 된다. 말 못할 속사정과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벽 뒤쪽으로 사라지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채록하는 매체가 된다. 그렇게 작가는 부재하는 것들을 존재의 층위로 되불러내는 것, 몸이 없는 것들에게 실체를 되돌려주는 것으로 사진을 재정의 한다.

 

막간. 그리고 작가는 약간씩 어긋나면서 중첩된 편집의 기술로 시간차를 표현한, 개별적인 물건들의 역사를 테마로 한, 아마도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작업 <빈방 2>(이외에 개인적인 작업으로 사물들을 매개로 망자의 오마주를 다룬 미발표 작업도 있다),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이 그렇듯 평생 조연급 인생을 살았을 사람들에게 단 하루 주연으로서의 삶을 살게 한 작업 <엑스트라>, 사람이 되고 싶은 마네킹과, 마네킹이 되고 싶은 사람(아니면 페티시, 물신, 그러므로 물화된 인간?)을 대비시킨 작업 <인덱스>, 시간이 엉키고 인과가 뒤집어진 채 반복되는, 현실 속 비현실(아님 현실과 현실인식의 차이)을 다룬 사진으로 사진적인 진실을 재고하게 만든 작업 <꿈에 본 거짓말>을 제작한다.

부분적으로 발표한 작업도 있고, 미발표 작업도 있다. 그 자체 완결된 경우로서보다는 현재진행형의 경우로 보이고, 그런 만큼 차후 작업에서 심화 확장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는 작업들이다. 대략 사진의 존재이유를 애도에서 찾는 작업, 사진적인 진실을 묻는 작업, 사진을 도구로 사회적 간섭을 매개 수행하는 작업 정도로 정리할 수가 있겠고, 그 자체 사진에 대한 작가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 가운데 특히 사진이 존재하는 이유를 애도에서 찾는 경우는 롤랑 바르트에 힘입은 바 크다. 롤랑 바르트에게 애도는 부재하는 것들을 소환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호출하게 해주는, 그 과정에서 파생된 트라우마(어쩜 푼크툼의 다른 이름일 수 있는)를 현재화하고 향유(?)하는, 그러므로 보기에 따라선 빙의와 영매로 나타난 작가의 영적 관심사와도 무관하지는 않은, 그런, 기획을 매개 수행하는 개념이다.

 

은미와 텍스트, 혹은 은미라는 이름의 텍스트. 작가는 <빈방>(2010) 이후 7여년의 공백을 깨고 <은미>를 주제로 작업을 시작했고(2018), 그 동안에 한차례 전시도 열었다(2019). 여기서 주제 은미는 보기에 따라선 익명적인 누구도 될 수가 있다. 작가는 은미를 자신만의 아토포스라고 부른다.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자면 내가 사랑하고, 나를 매혹시키는 바로 그 사람이며, 내 진실의 형상이다. 다시, 롤랑 바르트라면 마망(엄마)이 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객관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가 않다. 장소를 의미하는 토포스에 부정 접두어 아가 붙은 아토포스는 그러므로 없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 어떤 장소로 고정되지는 않는 것, 특정할 수 없는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은미>는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 더욱이 개별적인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가까운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 그래서 그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고백하고 그 과정을 재구성해 보여주는 작업이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 더욱이 개별적인 사상이 매개될 수밖에 없는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 그래서 텍스트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고백하고 그 과정을 재구성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텍스트를 주제로 한 근작(The Text1_쓰다와 읽다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일 고찰)과도 통한다. 결국 작가는 전작(은미)을 받아 근작(텍스트)에서 은미라는 이름의 텍스트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은미라는 텍스트 읽기(아님 혹은 동시에 쓰기), 은미라는 의미 읽기(아님 혹은 동시에 쓰기)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행은 은미라는 주제 자체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즉 작가는 주제 은미를 (숨길 은) (맛 미)라고 쓴다. 모르긴 해도 작가가 만든 조어일 것이다. 정색을 하고 말하자면 여기서 숨은 맛은 미학이다. 루시앙 골드만은 <숨은 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하이데거는 자기 속에 진리를 은폐하고 있는 것에서 예술의 특수성을 찾는다(대지와 세계의 변증법 그러므로 은폐와 비은폐의 변증법). 아마도 하나같이 숨은 의미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그렇게 나는 네가 아니다. 나는 네가 아니므로 내가 너를 안다는 것은 결국 내 식대로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너에 대한 나의 앎을 매개하는 개별적인 감정이란 뭔가(사랑하는 사람은 감정으로 읽는다). 그건 내게서 네 쪽으로 건너간 것이고, 너에게 투사된, 원래는 나에게 속한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도 마찬가지. 편지와 같은 개별적인 텍스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문서와 같은 객관적인 텍스트, 처음부터 그 의미가 닫힌 텍스트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경우의 사실상의 모든 텍스트가 개별적인 사상의 매개 없이 읽기란 불가능하다. 그걸 롤랑 바르트는 작가적 텍스트라고 부른다(공문서처럼 그 의미가 닫힌 텍스트 그러므로 독자적 텍스트와 비교되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동시에 독자는 또 다른 텍스트를 쓴다. 그러므로 독자는 독자이면서 동시에 작가이기도 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열린 예술작품>이 그렇고, 미셀 투르니에의 <흡혈귀의 비상>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그렇다. 책을 펼치면 종이절벽 위에 깨알 같이 매달려 잠자던 흡혈박쥐들이 일시에 날아올라 독자의 피를 빤다. 피를 빨면서 상처를 만드는데(흡혈효과), 텍스트의 의미는 그렇게 상처가 아로새겨지는 최종적인 장소들, 그러므로 개별적인 독자들에게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므로 다시, 결국 너를 읽는다는 것은 사실은 너에게 투사된 나의 욕망을 읽는다는 것이다. 네가 나에게 만들어준 상처, 내가 너에게 아로새긴 상처를 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애도라고, 애도가 불러일으키는 멜랑콜리라고 부를 수가 있었다.

 

의미론적 공백으로 남겨진 문구들, 그러므로 독자(그리고 관객)로 하여금 그 공백을 채우도록 초대하거나 강요하는 문구들로 유추해 보건데, 그때 그곳에서의 기억과 느낌을 재구성한 것일 터이다. 그건 비록 동일성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에는 차이를 확인하는 기획, 실패한 기획이다. 결국 은미라는 텍스트를 결코 읽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한 기획이다. 예정된 실패, 이미 알고 있었던 실패이지만, 그럼에도 기꺼운 실패, 그래서 찬란한 실패를 위한 기획이다. 그렇게 작가는 어쩜 아름다운 실패라는, 또 다른 예술의 중요한(그리고 의미가 있는) 쓰임새를 제안해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파스칼 키냐르는 모든 해석은 헛소리라고 했다. 이 말은 해석의 무용론을 말한 것이 아니다. 모든 해석은 자의적이고 임의적이라는 말이다. 모든 해석은 그 자체 창작 그러므로 문학이라는 말이다. 그런 만큼 객관적인 읽기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텍스트가 없으면 해석도 없다. 하나의 텍스트가 불러일으킨 임의적인 해석, 하나의 예술작품이 불러온 자의적인 해석, 그러므로 어쩜 저마다의 아토포스가 초대한 읽기에 예술은, 문학은, 창작은 기거하고 있다. 그 초대가 없었더라면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존재할 일이 없을, 그런 읽기에 기생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그 상호작용을, 작가와 독자(그러므로 관객), 쓰기와 읽기의 상호영향관계를 작업을 위한 형식논리로서 부려놓고 있는 것이다.

 

 

작가 이야기

 

저는 의미가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미는 작가로부터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전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작가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고, 깊고 어두운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넣는 역할을 할 뿐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파동이 그려지고 무엇이 두레박에 담겨 올라올지는 순전히 관객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작가는 의미를 만들고 찾는 화두를 제시할 뿐이고 관객 각자의 생각과 고민으로 의미가 완성되고 재생산된다 생각합니다.

 

제 작업은 사진장치의 매카니즘 특성에 대한 고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진은 여타의 시각매체와 달리 기계장치와 광학적 프로세스를 거쳐 만들어집니다. 작가의 개입과 의도가 닿지 않는 과정이 존재함으로 온전한 의미의 생성이나 전달이 불가능한 기호입니다. 순수한 인덱스, 자동생성의 이 과정은 비어있는 의미를 수용자인 관객이 자연스럽게 메우는 것으로 완성되고 주관적 해석의 작동이라는 사진적 특성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통해 관객에게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관객들이 찾게 하는 비어있고 열려있는 사진 작업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외부세계에 대한 인지의 대부분을 시각에 의존하고 있는데, 시각의 구조적인 한계로 인하여 눈앞에 주어진 외부세계를 온전히 볼 수 없다는 게 제 작업의 또 다른 맥락입니다. 외부세계의 상이 맺히는 우리 안구에는 시신경이 없어서 상이 맺히지 않는 맹점(盲點_blind spot)이 있기 때문입니다. 맹점에 이미지로 상이 맺힌 부분은 누락되어 인지가 불가능합니다. 인지에서의 원천적인 누락은 외부세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배우자조차도 결코 알 수 없는 사람으로 결론짓게 합니다.(전작인 은미_隱味참고)

 

이렇게 저는 인간의 구조적인 한계로 영원히 알 수 없는 외부세계를 사진장치의 특성과 연관해서 풀어내는 작업을 <THE TEXT>라는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 18일까지 잇다스페이스(관장 이영희)에서 전시되는 THE TEXT 1 1,2,3으로 구성될 THE TEXT 시리즈의 첫 번째 전시입니다. <THE TEXT> 시리즈는 쓰다와 읽다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일 고찰’, ‘연구’, ‘제안의 부제가 각각 붙고 제 고민의 진행을 전시로 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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