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휘 소나무 사진전
이성휘 소나무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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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2.1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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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지송
일시 : 2020년2월28일-3월13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1관

소나무와 달생(達生)의 경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

이경률

 

 

재경이라는 유명한 목수가 나무를 깎아서 북틀을 만들었다. 북틀이 만들어지자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귀신이 만든 것 같다고 모두 놀랐다. 노나라 제후가 그것을 보고 재경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도술로 이 북틀을 만들었는가?” “저는 목수인데 무슨 도술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저는 북틀을 만들 때 기운을 소모하지 않고 반드시 재계(齋戒)함으로써 마음을 고요하게 만듭니다. 사흘 동안 재계하면 감히 이익이나 벼슬과 녹을 생각하지 않게 되고, 닷새 동안 재계하면 비난과 칭찬, 교묘하고 졸렬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이레 동안 재계하면 문득 제 손과 육체까지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 이때 산으로 들어가면 완전한 재목을 찾아낼 수 있고 또한 완전한 북틀이 마음속에 떠오르면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장자달생(達生)에 나오는 목수 이야기다. 우리가 달인의 경지(境地)라고 말하는 달생(達生)은 삶의 진실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목수가 나무를 깎고 북틀을 만드는데 있어 그의 혼()에 따라 북틀을 만들 수 있는 경지 즉 무아지경(無我地境)을 말한다. 또한 무아지경은 자아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유아지경과 달리 사물의 입장에서 자아가 합쳐지는 물아일체 즉 주체와 객체가 교감하는 절대 경지를 말한다. 그것은 ()’에 의해서 ()’으로 전이되는 것으로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에 나타나는 장주와 나비의 모호한 경계(境界)와 유사하다.

 

그래서 달생의 경지 즉 달인(達人)의 놀라운 솜씨는 오랜 연습을 거쳐 습득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무아지경에 이르는 경지를 말한다. 달인들이 하는 놀라운 행동은 결코 남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만 알고 있는 경지다. 예컨대 우리가 보기에 숙달된 달인의 동작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위로 보이지만 수 십 년 똑같은 일을 했을지라도 매번 동작을 할 때마다 언제나 마음을 처음으로 돌리는 초기화 즉 초감각적인 경()의 세계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예술은 바로 이러한 경의 세계를 통해 발현되며 작품은 그러한 정신의 결과물인 셈이다.

 

여기 보이는 작가 이성휘의 사진은 바로 이러한 삶의 진실로서 달생의 혼을 지향하고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한반도 전역에 고루 분포한 나무로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 있는 흔한 소나무다. 그러나 그가 촬영한 소나무는 사물의 세계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 놀라움 그 자체로 나타난다. 한 폭의 진경산수를 연상하게 하는 소나무들 예컨대 한 폭의 비단치마와 같이 처진 장수 노곡리 소나무, 기이한 형태의 영월 솔고개 소나무,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영송, 흥덕왕릉 소나무 숲, 말미잘 모양의 특이한 옹이를 보여주는 거창 대동리 소나무 특히 운무 속 하늘로 곧게 뻗은 수 백 수 천 그루의 금강송은 한민족의 굳센 기상과 지조를 상징하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넘어 응시자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런데 작가의 경이로운 소나무들을 자세히 보면 예견치 못한 형태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좋은 사진이 아니라 오히려 기이하고 특이한 장면들로 보는 이로 하여금 미묘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게 한다. 예를 들어 부채 모양으로 넓게 펼쳐진 의령 운암리 소나무는 뒤엉킨 실타래나 미세 실핏줄 같은 기묘한 형상을 보여주고, 마치 뱀들이 춤을 추듯이 우글거리는 남원 부절리 소나무 숲은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에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하고 섬뜩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와 같이 작가는 안개 낀 운무의 전형적인 소나무나 진경산수의 외솔이 아니라 예견치 못한 비선형적인 이상한 형상을 보여준다.

 

게다가 소나무 분재(盆栽)를 보듯이 천 길 낭떠러지에 걸려있는 한 그루 소나무와 그 주변의 어두운 배경이 만드는 엉뚱한 조합 그리고 기념비처럼 우뚝 선 거대한 소나무와 그 배경으로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기와집과 초원이 만드는 소격효과(疏隔效果)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장면으로 만든다. 한 마디로 그의 소나무들은 좋은 사진을 위한 구도나 앵글에 포착된 것이 아니다. 괴기한 엉뚱한 구도, 예견치 못한 앵글, 흑백의 콘트라스트, 이중으로 겹쳐진 착시효과, 파노라마 등의 의도적인 장면은 결코 우연도 연출도 아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좋은 사진이 아니라 달생의 직감으로 포착된 결정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달인의 신기가 무아지경으로부터 발현된 것이라면 진정한 예술은 삶의 경지로 드러난다.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막사발이라 할지라도 도공의 혼이 스며들면 사발 안 깊고 고요한 옹달샘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그의 소나무들은 한반도 전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무들임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관찰하는 유아지경을 넘어 사물과 자아가 합치되는 무아지경을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관해 나는 야생화에 매료되어 전국 산천에 자생하는 희귀한 야생화를 수 십 년 동안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내가 터득한 것은 낮은 자세로 야생화와 함께 뒹굴거려야 그 아름다운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소나무 역시 내가 언제나 그 밑에서 뒹굴거렸기 때문에 남들이 보지 못한 특이한 앵글을 잡을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곧 장자가 말로 설명하거나 배울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고 했듯이 작가의 사진 행위는 단순한 기교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위(無爲)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사진의 진정한 이해는 사진의 구조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만든 작가의 본원적인 의도를 이해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사진을 다른 매체와 구별시키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또한 사진을 보는 응시자 역시 단순한 소나무의 진경(眞景)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이해하는 관점의 변화 즉 주체-관객(sujet-spectator)의 입장에서 자신의 경우로 환원시키는 읽기의 개종이 필요하다. 이를 경우 작가의 소나무는 일종의 사진으로 나타난 추상으로 슬그머니 삶의 순리를 누설하면서 응시자로 하여금 자신이 걸어 온 뒤안길을 보게 한다.

결국 작가가 보여주는 소나무들은 오히려 삶의 무게로서 자신의 아쉬움과 회한 그리고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구와 충동의 지표(index)일 것이다. 삶의 긴 굴곡을 지나면서 침전된 경험적인 것과 세상을 관조하는 작가의 냉정한 눈에 포착된 것이 바로 소나무다. 그것은 빛과 어둠 그리고 유아와 무아의 경계에서 흔히 선불교에서 말하는 수련과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삶의 진실임과 동시에 진정한 예술의 혼으로서 달생의 경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

이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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