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 변론 독자적인 지하철 공간의 매력
김석원 변론 독자적인 지하철 공간의 매력
  • 포토저널
  • 승인 2012.09.28 12: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 지하철 풍경 - 개똥녀와 무 개념녀
2005년 지하철에서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고 내린 어떤 여성의 이야기가 논란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여성은 어느 날 갑자기 개인의 신상과 함께 자신의 얼굴 사진이 사이버 상에 급속도로 퍼지면서 많은 네티즌들에게 집중적으로 테러를 받았다. 이런 행위는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일종의 사이버 인민재판의 형식으로 보여서 마음이 불편했었다.

정작 문제는 그 여성의 잘못된 행동과 관계없이 본인의 의사는 고려하지 않고 타인에게 강제적으로 얼굴이 노출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개인에게는 인권침해에 해당된다. 더군다나 본인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해명할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일반시민들이 어떤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목격하고 그 부분을 충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이버 상에서 집단적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매장 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행위는 사이버 상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폭력인 셈이다.
 

 

 

 

 

 

 

 

 

 

 



이 여성의 행동이 사회적인 규범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죽을죄(?)를 진 것은 아니다. 그녀의 행동이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사회에 멸시와 비난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신분과 개인의 신상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지켜져야 한다. 타인의 행위를 고발하는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휴대 전화기에 부착된 카메라의 역할이 컸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찍을 수 있는 특성과 인터넷에 올릴 수 있는 편리성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다른 측면에서 네티즌들의 심리를 생각하면 오프라인의 미디어들은 어떤 사건을 보도하기 이전에 다양한 검증절차를 거치지만, 네티즌들의 행동은 사건을 보도하기 전에 숙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응징하려는 사람의 사진과 신상정보를 거리낌 없이 즉흥적으로 공개한다. 그들은 왜 이런 분별력 없는 행동을 할까?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은 응징하고자하는 대상에 대한 분노와 사회적인 정의감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개인이 관여해서 특정한 사람을 단죄하는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국가기관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이처럼 비상식적인 행동은 국가의 권력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고자하는 개인들이 타인의 행동을 간섭하고,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집단으로 변질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볼 때 인터넷 매체보다 더 본질적이고 직관적인 새로운 매체가 등장해서 정착화 한다면, 네티즌들의 글이나 항변 등이 설득력이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생성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요즘의 상황은 마치 시장판처럼 번잡스럽다.

<개똥녀 사건>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네티즌들의 주장은 다수의 논리가 우위를 차지한다는데 있다. 소수의 논리는 설자리가 없다. 소수의 논리가 아무리 정당성을 확보해도 다수의 의견이 많을 때는 소수의 의견은 파묻히게 된다. 인터넷에서 접속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한쪽 방향으로 치우치면서 그 영향력이 공중파 방송과 신문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예를 자주 목격한다.

문제는 여과장치 없이 쏟아지는 네티즌들의 다수의 의견을 제어할 수 있는 강력한 규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인민재판장이 되어버린 인터넷 공간을 제어하는 장치가 있어야 하고, 올바른 의견을 제시하는 소수의 의견이 존중되는 문화가 형성되야 한다.

2011년에도 지하철에서는 끊임없이 사건이 발생했는데 대표적으로는 <지하철 무개념녀>가 논란이 되었다. 이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지하철에서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함께 탔는데, 개와 함께 지하철에 어떻게 타느냐고 젊은 여성이 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분이 시각장애인이고 안내견과 함께 탔다고 말을 했지만, 안하무인으로 말을 듣지 않고 비상용 전화기로 역무원에게 지하철을 세워달라고 신고해서 지하철 운행을 중단시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개똥녀 사건>과 <지하철 무개념녀>의 벌어진 상황을 볼 때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만 하다. 만약 자신이 시각장애인이었고, 안내견과 함께 지하철을 탔는데 똑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다른 사람이 개와함께 지하철을 타서 더럽다고 한다면 과연 기분이 좋을까? 더군다나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잡다한 얘기까지 알게 되는 현실이 별로 달갑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쓸데없는 일을 안보고 안 듣고 살수는 없는 것일까?
죽음의 순서는 알 수 없다
얼마 전 인터넷 상에서 주호민 작가의 <神과 함께>란 만화를 봤었다. 이 만화는 평범한 직장인이 살다가 죽은 후에 저승으로 가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내용은 이승과 저승으로 나누어졌다. 평범하게 살다가 죽은 인간의 삶을 코믹하게 구성한 것인데 이상하게 이 만화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 만화에 등장하는 내용은 지극히 평범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만화의 내용을 살피면 이렇다. 만화의 주인공 김자홍은 1971년 3월 19일 출생해서 2009년 12월 7일 41살의 나이로 죽는다. 사인은 과도한 스트레스와 음주로 인한 간질환 때문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 저승사자는 김자홍을 데리고 저승으로 가기위해서 대화역에 간다. 대화역에서는 저승열차와 이승열차가 구분되어있는데 저승열차가 이승열차와 부딪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새벽 2시에서 5시까지 운행을 한다. 만화에서 이승열차는 이승으로 가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한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전동차가 들어오면서 다음과 같은 안내방송이 나오는 대목이다. “ 띠리리리~~ 지금, 초근문(저승입구), 초근문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전선 밖으로 한걸음 물러나지 않아도 죽을 염려는 없겠네요.” 라고 말하며 전동차가 도착한다. 주인공 김자홍은 저승에서 국선 변호사(?)를 만나서 도산지옥, 화탕지옥, 한빙지옥, 감수지옥, 발설지옥, 독사지옥, 거해지옥의 재판을 모두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여섯 개의 문’ (지옥문, 아귀문, 축생문, 아수라문, 인간문, 천상문) 에서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다는 내용이다.

주호민의 만화 <神과 함께>는 사진작가 브루스 데이비슨의 서브웨이(SUBWAY)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사진에서는 뉴욕의 지하철 풍경을 통해서 일반시민들의 일상을 잘 표현했는데 마지막 장면이 꽤나 인상 깊었었다. 오래 전에 본 그 장면은 지하철이 플렛 폼을 빠져나가는 지하철 승객들의 모습은 마치 저승으로 가는 장면을 연상 시켰는데, 그 것은 주호민 작가의 <神과 함께>의 한 장면이 떠올려지고, 한국작가로는 고영애의 <러시아 지하철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그녀의 사진에서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끝없이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듯 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에서 죽음을 향해 서서히 근접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그들의 걸음걸이에서 암시하는 작용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소실점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도착한 지점에 다다르면 똑같은 길이 반복될까? 아니면 그것으로 끝일까? 소실점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되지만, 왠지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든다. 그 두려움을 자신의 인생과 비교해보면 아마도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이(수명)’ 만큼 살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일 것이다. 그 길이란 것이 사람마다 모두 틀리겠지만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몇일 전 장례식장으로 가는 도중에 K 작가와 문자를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예기를 했었다. 사람의 삶 이란게 참 허무하다는 말과 함께,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는 것은 순서가 없다고 했었다. 돌아온 대답은 소름끼치는 것이었는데, K 작가는 “나보다 자신이 앞 번호 일수도 있다고 하면서 섬뜩한 농담이라서 웃을 수 도 없다”고 했다. k 작가가 나보단 훨씬 늦게 태어났지만 누가 먼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죽는 수명이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서글플까? 그렇게 죽는 것을 우리는 아무런 저항 없이 무조건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가 운명 앞에 무방비 상태 일 수밖에 없다면 운명 앞에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스펙터클한 얼굴들
나는 몇 년 동안 고영애를 지켜보면서 느꼈던 것은 건축적인 구조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그녀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깊은 역사를 간직한 <러시아 지하철에서>로 이동하게 된다. 러시아 지하철은 1935년 스탈린(Ioseb Dzhugashvili)의 독재시절에 처음으로 운행을 하기 시작했었다고 한다. 그 당시 러시아와 미국은 서로가 세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 군사적으로 대결하는 냉전시기였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는 전쟁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서 지하에 깊숙하게 방공호를 겸비한 지하철을 만들었다. 현재 러시아 지하철은 그 시대의 건축물이 지금까지 보존 되서 역사적인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러시아에 있는 모스크바 지하철은 노선거리가 파리에 이어 유럽대륙에서 2위를 기록하며,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고 오랜 역사로 유명하다.

지하철은 똑 같은 모양의 역사는 한 개도 없으며, 모두가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시공되고 다양한 모자이크와 착색유리로 장식되고 조각이 배합되어 있다. 고영애는 이 사진에서 스탈린의 정책에 반대한 사람들을 배치시켜서 구성했는데, 유선형의 구조를 가진 지하철은 러시아 시민들이 하루에 50만 명가량 이용한다고 한다. 지하철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영국 런던에서 1863년 증기 기관차로 운행을 하다가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한 1914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경쟁적으로 생기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대도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예술가들은 앞 다투어 지하철을 중심으로 도시와 일상, 욕망을 표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지하철에서 고영애는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일까? 그녀는 도시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인 지하철에서 순간적인 정지와 움직임, 텅 빈 공간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군상들의 모습에서 서로를 고립하고 소외시키는 사회적인 현상을 떠오르게 한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이해타산에 의해서 따돌림 당하기도, 고립되기도 하는 현상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도시의 구조에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을 지하 공간 안으로 빨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들 스스로가 빨려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구조는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장치이다. 지하철 공간에서 벽면을 메운 장식적인 기능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 그것은 자연스러운 상태를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연출한 공간이다. 나는 사진에 러시아의 역사적인 흔적이 드러나는 일종의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인 박물관의 기능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공공장소로서의 성격’ 이 있다. 작가의 사진을 보고 있자면 공공장소의 성격을 유지하지만, 일반적인 박물관처럼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인상을 준다. 벽면의 장식과 지하철 승강기의 장식물은 권위와 전통을 갖추고 있었다. <러시아 지하철에서>이 지닌 색채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화려하게 보이는 색채는 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물질적/ 역사적인’ 기능을 하며, 색채의 효과가 지닌 의미에서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러시아 지하철공간은 도시에서 강력한 사회적 풍경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스펙터클한 장소로 무장한 지하철 공간은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서 촉각적인 기능을 함께 병행하는 것이다.

작가의 지하철 사진 하단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솔제니친, 빅토르 최, 푸틴, 고르바조프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들의 얼굴은 클로즈업 돼서 반복적인 4장의 사진으로 구성되어있다. 시선의 방향은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어느 한 부분을 지속적으로 응시하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영화에서 필름프레임의 한 단면을 연상시키면서 ‘단독성과 연속성’이 함께 공존하는듯하다. 예를 들면 단독성은 프레임의 정지된 순간으로서 사진의 기록적인 측면을 보여준다면, 영속성은 이미지의 시퀀스 속에서 반복적인 이미지들이 움직임으로 이동하는 전체의 일부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사진속의 얼굴이 지닌 의미를 들여다보면, 클로즈업된 얼굴은 단순한 개인의 이미지를 전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얼굴 안에서 드러나는 전체적인 역사를 알 수 있게 유도하는 측면이 있다.

얼굴은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들뢰즈(Gilles Deleuze)의 표현을 빌린다면 ‘가독적(legible: 읽기의 대상)’ 인 하나의 표면을 산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일상에서 얼굴의 기능에 대해서 생각하면 얼굴은 인간의 지각행위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것으로서, 스펙터클로서의 기능을 한다. 고영애의 <러시아 지하철에서>는 러시아 지하철의 역사적인 모습을 박물관의 형식을 차용해서 기록하고, 스탈린의 정책에 반대한 역사속의 인물을 다시 제 구성해서 배치 한 것은 ‘스펙터클(구경거리, 재현)’ 로서의 외양을 카메라의 세밀한 특성으로 고정시켰다. 고영애가 러시아 지하철과 역사적인 인물의 얼굴을 결합시킨 의도는 스펙터클한 사회와 문화현상에 반응하고 표현한 결과를 낳았으며, 작가의 상상력이 관객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깊이감과 두께를 부여한 사진 적 특징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사진1)고영애,모스크바지하철,디지털프린트,64×92cm,2006,폴리코트에필름20×80×7cm,2008

(사진2)고영애,모스크바지하철,디지털프린트,64×92cm,2006,폴리코트에필름,20×80×7cm,2008

(사진3)고영애,모스크바지하철,디지털프린트,64×92cm,2006,폴리코트에필름,20×80×7cm,2008

(사진4)고영애,모스크바지하철,디지털프린트,64×92cm,2006,폴리코트에필름,20×80×7cm,2008

(사진5)고영애,모스크바지하철,디지털프린트,64×92cm,2006,폴리코트에필름,20×80×7cm,2008

(사진6)고영애,모스크바지하철,디지털프린트,64×92cm,2006,폴리코트에필름,20×80×7cm,2008

(사진7)고영애,모스크바지하철,디지털프린트,64×92cm,2006,폴리코트에필름,20×80×7cm,2008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