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기념비 인가?
누구를 위한 기념비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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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9.2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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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기념비 인가?
이현경(미술비평)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70년경, 대리석, 실물보다 큰 흉상, 135cm,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그리스?로마 시대 신 또는 제국의 황제의 두상이나 흉상을 대리석에 새김으로써 그 특정 대상을 기념하는 기념비 조각은 조각가들의 솜씨에 의해 그 대상의 권력과 크기, 압도적이며 숭고한 분위기, 특정 시대를 산 시간의 아우라와 동시에 영원성과 불멸성을 내뿜는 존재로 탈바꿈되어 오랜 시간동안 공공에게 숭배의 대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기념비적인 조각은 조각에 있어서 매우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고전적인 주제가 되어 왔으며, 특히 인간의 형상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얼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인간의 내면의 정신성, 지식의 축적, 자아정체성, 그 인생의 삶의 여정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표상으로 각인되어 왔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러한 기념비성을 띠는 이미지는 한 국가의 왕의 권력이 절정에 치닫고 있을 무렵에는 한 사람의 절대적 권력을 용인하는 초상으로 바뀌기도 하였고, 복잡한 근?현대사 속에서 한 특정 이데올로기와 만날 때에는 맹목적인 우상 숭배의 성향으로 기울어지기도 하였다. 초(超)역사적인 숭고함을 띠는 애초의 기념비적인 성격이 독재자와 결합하게 되면서 거짓과 폭력을 포장하는 왜곡된 표상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마오쩌둥 제1초상>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왜곡된 기념비성을 일상적인 삶으로 경험한 세대는 다양성과 자율성이 존중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1960년대 중국에서는 문화혁명 기간 동안 사회주의의 계속 혁명이라는 명분 아래, 공산주의 권력에 반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사살되었고, 일체의 구습을 타파한다는 목적으로 중국의 찬란한 문화유산과 종교적 유산이 파괴되었으며, 결정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이 극도로 억압되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70, 80년대 군부 독재의 민주화 탄압이라는 길고 혹독한 터널을 건너왔다. 즉 60년대에서 80년대는 오늘날의 기성세대가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에 이르는, 한 사람의 총체적인 삶의 방향성이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였는데,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위선적인 우상 이미지 속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군부의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독재 이미지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기며 삶의 방향성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숭고한 기념비의 탈을 쓰고 행해진 정치, 사회적인 만행이었다.

그리고 여기, 한국과 중국에서 이러한 시대의 아픔을 목격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작가들로서 조각의 전통적인 기념비성을 화두로 내세우는 작품이 있어 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963년 중국 허베이성 한단 시에서 태어난 팡리쥔은 천안문 사건이 있었던 89년 베이징에서 중앙미술학원을 졸업하였고 1963년 같은 해 대전에서 태어난 김석 작가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 중반 서울 홍익대에서 조각을 전공하였다. 동시기 각기 다른 나라에서 사회적 혼돈을 경험한 이들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위기를 감지하였다. 이들은 거대한 국가라는 폭주하는 기관차 속에 한없이 작아진 개인의 존재를 느꼈으며, 이 작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허무의 늪을 건너온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시대의 표면에 내세워진 거짓된 기념비 뒤에서 버려지고 묵살되었던 인간 본연의 내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김석, <지식의 무게를 자각하는 지식>, 2001, 부분 혼합 재료, 강철봉, 바닥에 설치
 

팡리쥔(Fang Lijun), <무제>, 2006, 동, 금박, 철, 840×560×32cm
 

팡리쥔, 부분, 2007, 벨마 예술과 사상 실험실, 덴버, 미국 전시 광경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는 두 작품을 보면 가느다란 철봉 위에 인간의 머리가 군집을 이루며 꽂혀 있다. 앞서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 인간의 머리는 내면의 정신성, 이들이 배워 왔던 지식의 축적, 자아정체성, 그 인생의 삶의 여정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표상이다. 그런 인간 자체를 상징하는 이 두상들은 심약한 철대 위에 꽂혀 있음으로 해서 작은 동요에도 흔들리는 불균형적인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이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같은 시대와 사회를 공유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김석의 작품에 나타나듯이 이 두상들은 주물 작업으로 인해 획일적인 형상을 지니고 있으나 각기 다른 색채와 무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에 개개인의 다양한 정체성과 구체적으로 다른 삶의 경험을 보여준다.

비록 위기 속에서 불균형적인 형상을 지니고 있으나 즉 집단적으로 기형적인 상흔이 새겨졌어도 개인의 자율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편 팡리쥔의 작품에서 두상의 형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를 유명하게 만든 유화 작품 ‘바보 건달’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팡리쥔의 회화 속에서 자조 섞인 미소를 띠며 어슬렁거리는 까까머리 건달들은 바로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다. 동시에 이들의 표정은 문화혁명 기간에 자아의 강렬한 염원들이 철저히 말살되고 무산되었던 시간의 허무함을 담고 있다.
 

팡리쥔, <연작2 No.3>, 1991-1992, 200×200cm, Fukuoka Asian Art Museum ⓒLeolook.com
 

팡리쥔, <무제>, 2006, 동, 철판에 금박, 실물크기
 

김석, , 2009, 110×130×22cm, 철판, 폴리에스터, 금

팡리쥔은 그의 주된 표현 매체인 유화를 잠시 벗어나 금박을 입힌 바보건달을 집단적으로 보여주었는데, 몸을 빼앗긴 그들은 회화보다 좀 더 그로테스크한 얼굴로 짓이겨져 있으며, 체념을 담은 얼굴로 그 특유의 냉소적 사실주의를 확장시키고 있다. 어린 시절 지주였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공개 비판하는 장소에서 군중 속에 묻혀 강제적으로 비판해야했고, 지주 계급이었다는 출신 성분만으로 오랜 시간 친구들의 모욕과 구타에 시달렸던 팡리쥔의 의 삶을 돌아보면, 마오쩌둥의 우상 아래 가려졌던 작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보다 일그러진 두상으로 투영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 나아가 팡리쥔은 이들 조각 작업에 금박을 입힌 이유를 설명한다.

내가 이 두상들에다 금을 사용한 이유는 우리 모두 금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이나 신을 묘사할 때 금을 사용한다. 그것은 금으로 선한(good) 삶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맹세를 할 때도 금으로 인장을 찍는다.…나는 이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를 리얼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 또한 단지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팡리쥔, 《두상-팡리쥔 개인전》브로슈어, 2007. 4.18-8.26, 벨마 예술과 사상 실험실, 덴버 미국)

팡리쥔이 바닥에 진열한 또 다른 작품은 중국 예술계에서 유명한 인물들의 두상이기도 하고, 예술가의 친구거나 또 알려지지 않은 개인의 두상에 금박을 입혀 만든 조각 작품이다. 이 두상들은 제 각기 놀라거나, 열망을 담거나, 지루하거나, 욕망어린 표정을 담는 순간을 포착해 만들어졌는데, 작가에게는 이렇게 다양성을 띤 개개인이 바로 인간 존재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형상인 것이다. 이들은 국가의 맹목적인 목소리에 휘둘리며 강제적으로 메아리만을 울리는 집단이 아니라 선한 삶을 대변하는 형상이며 자율적인 목소리를 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작가에겐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한편 다른 의미로 금이라는 대상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욕을 상징하며 자본주의 자체를 표상하기도 한다. 2000년대인 지금 중국은 문화혁명이라는 무법 상태를 거쳐 글로벌한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작가의 작업에 금박이 입혀졌다는 것은 역시 이러한 물욕의 시대를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중국과는 다르게 소비?자본주의의 물결 속에서 일찍부터 광고와 트랜디한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김석 작가는 팡리쥔보다 훨씬 전부터 이런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고,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 사회의 속성을 지속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반영하듯 그의 작품에서 부조로 새겨진 아기의 미소는 온통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흔히 광고에서 3B는 소비자 마케팅의 성공의 공식으로써 Beauty(미인), Baby(아기), Beast(동물)를 지칭한다. 이들은 소비자에게 어떠한 상황에 놓여도 무조건적으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들이기에 소비 사회에서 마르지 않는 수요의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김석 작가는 이러한 3B 중 하나인 아기에게 황금을 입힘으로써 풍요로운 물질 속에서 끊임없이 소비의 욕망에 시달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청년기를 보낸 시기는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본성이 군부 권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시기였지만, 이제 시대가 변한 200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폭력이 아닌 감성적으로 파고드는 황금의 권력 속에서 인간의 진지한 본성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로 흘려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기념비성을 다시 기억해 보면, 한 인물의 얼굴이 조각적인 기념비성을 지니게 되면 그 인물은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되고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의미가 된다. 오랜 시간 기념비적인 조각의 전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김석 작가는 다시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지금의 시대를 대변하는 기념비는 바로 황금과도 같은 물질성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소비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 권력, 물질적인 기념비 속에서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특정한 순간, 개성을 갖춘 자아, 세대를 관통하는 영속성, 불멸의 정신성은 소외되고 무시되는 것이 아닌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보여지는 광고의 이미지는 외면의 중요함을 강조하지만 정작 이러한 표피 이면에 내재되어 중시되어야 할 것들, 즉 진정한 기념비성을 갖춘 인간적인 중심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황금 아기를 들어 역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리없는 권력을 부여받은 소비사회의 기념비가 누구를 위한 기념비였던가를 끊임없이 되물으며, 자각할 필요가 있음을 바로 예술 작품을 통해 각성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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