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임규 사진展 Architectural Drawing
황임규 사진展 Architectural 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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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6.14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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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임규 사진展 / Photography
2021_0617 ▶ 2021_0626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435-1 B1

건축은 인간의 삶을 시간과 공간에 안내해 주는 동반자이다. 우리는 건축물을 통해 존재 자신이 자리하는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 대면하게 된다. 건축을 통해 구현되고 분할되는 인간의 시공간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하나의 인격체로,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몸으로 느끼고 대화하게 된다. 건축가는 시간, 공간, 장소 그리고 환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건축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특성을 찾는다. 나는 건축가이자 동시에 건축물이 완성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한 개인으로 건축에 대한 나의 생각과 상호작용을 통해 내가 느끼는 실체를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때문에 나의 사진은 건축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이야기이며 건축물을 통해 바라본 시간과 공간에 대한 건축적 해석이다.

 황임규 사진가

 

 

생명, 건축과 인체의 교차로

 

박치완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문화콘텐츠비평가)

 

사진은 작가가 남긴 정신의 흔적이다. 우리는 흔적을 시각적 이미지로 감상하면서 작가가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전언(傳言) 무엇인지를 캐내려고 애쓴다. 하지만 사진에서의 전언은 소설에서처럼 친절하게 기술되어 있거나 묘사된 것이 아니어서 표상된 작품 내에서 발견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황임규 작가의 이번 작품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건축에 대한 일종의 철학적 물음에로 감상자를 인도하고 있다고나 할까. 건축과 인체의 관계, 사이에 가로 놓인 메꿀 없는 거리, 서로 다른 대상의 이질성을 메꾸고 연결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상자의 몫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감상자에게 사고의 고통 유발(誘發)하고 있다.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제시하고 있기에 감상자의 상상력, 사고는 바빠질 수밖에 없다. 그의 카메라 렌즈의 안내를 받아 감상자의 시선이 멈추는 곳에서 펼쳐지는 것들은 우리가 건축현장에서 흔히 있는 미완의 파편들과 드로잉 뿐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장면들일 있다. 하지만 이것들을 인체와 연결시켜 보라. 뼈와 살과 혈관과 영혼이라 것들이 상처 채로 널브러져 있지 않은가.

 

정작 사진 속에 부재하는 작가의 전언과 감상자의 눈 앞에 펼쳐진 너무도 친숙한 장면들, 감상자는 바로 사이에서 긴장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사진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말하는 사진은 감상자를 모독하는 사진이다. 사진들 앞에서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시 보라, 극사실적인 건축 구조물들의 야성(野性) 꾸밈없이 노출하고 있는 , 강판, 철골, 화강암, 잡석, 시멘트, 와이어, 전선, 원통 파이프 등을! 감상자는 이와 같은 소재적 강렬함과 단순함에 시선을 빼앗겨서는 된다. 이것은 분명 작가의 트릭이다. 소재적 강렬함과 단순함에 시선이 마비된 감상자라면 그는 황임규 작가의 사진들을 모든 것을 말하는 사진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의 사진들 앞에서 마비되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작품들을 단지 공사현장의 파편들로 보는 우리의 상식이라는 것을 잊어선 된다. 작품 하나하나에 시선을 고정할수록 말을 잃는 것은 감상자이다. 각각의 사진들이 신체의 일부라고 상상해라. 다양한 지체(肢體)들을 줌인해서 바라보는 것은 섬찟하기만 하다. 빔도 철골도 원통 파이프도 곧추서 있다. 그라인더로 갈아낸 벽도 벽을 타고 흐르는 수직의 가느다란 물줄기도 곧추서 있다. 날이 이미지들은 긴장을 늦추면 감상자의 피부를 뚫고 들어올 것만 같다. 전율이 느껴진다. 감상자의 감각이 그의 작품들 앞에서 이완되기보다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긴장한 시선은 의식으로 전달되어 주먹을 쥐게 만든다. 그렇게 수직으로 곧추선 이미지들과 함께 있는 감상자를 향해 작가는 그의 전언을 사진 뒤에 숨어 속삭인다. “내가 대지에 뿌리박고 있기에, 그대가 세상에 존재할 있는 이라고.

사진작가는 기본적으로 피사체 밖에서 피사체를 겨눈다. 사진의 전언 역시 전시된 사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언 역시 감상자의 시선이 머무는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보이는 것을 보았다 말하는 감상자는 사진의 본질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눈앞에 전시된 사진과 진정으로 대화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사진 속에 집적시켜놓은 비밀코드들을 풀어헤쳐야 한다. 그런데 천만다행인 것은 황임규 작가가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며 건축 이라는 개의 화두를 가지고 있다고 기획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건축과 인체를 연접(連接)시킴으로써 작가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 자신의 몸을 해부학적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모든 건축물이 우리의 몸의 구조와 다르지 않다는 주문(呪文) 외고 있는 것이다.

연접의 효과로 황임규 작가가 감상자에게 기대하는 , 그것은 아마 모든 건축물은 인간과 같은 생명체다라는 암시가 아닐까. 직립의 상징인 건축과 인간, 둘은 수직성에서 유사성을 갖는다. 수직성은 건물의 표상이자 직립하는 인간의 상징이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좋을 것들, 언젠가 건물이 완성되면 자연스럽게 감추어질 것들을 이렇게 황임규 작가는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건축물의 내부로 초대한 것이다. 조금 정확히 말하면, 건축과 인간을 맞세워 일종의 사고실험을 모색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황임규 작가의 사진들에는 보이는 이면(裏面) 차원이 추가로 있다. 새로운 차원이 있기에 그의 사진은 오롯이 작품으로 승화된다.

단지 바라보는 것으로 그치는 이미지가 아니라 사고하게 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건축의 단면들이 인체와 결합되기 위해서는 양자 사이의 간극을 감상자가 메꾸어야 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는 터널의 건축가 널리 알려진 그리스의 유팔리노스(Eupalinos) 평가하면서 그의 건축은 몸의 투영이다라고 언급한 있다. 현대건축에서 인체를 응용한 사례가 많다. 하지만 건축가이자 사진작가인 황임규는 이번 작품집에서 건축의 본질이 인간의 인체와 둘이 아님을 보여준다. 건축과 인체의 연접을 생생한 사진들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영혼이 신체의 건축이듯, 건축이 인간의 영혼이 깃든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진은 순간의 ()’. 순간은 시간의 뼈이자 혈관이다. 황임규는 작가는 우리에게 시를 읽는 마음으로 그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멈추어 놓은 순간들을 성찰하기를 바랄 것이다. 시화(詩化) 그의 사진들이 생명체로 거듭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감상자의 몫이다. 사진으로 자신의 철학을 대신하는 황임규 작가가 노린 , 감히 말하지만, 그것은 수직성의 긴장이 아닌 수평에서의 이완과 휴식일 것이다. 표지화에 찍힌 발자국의 주인공들, 그들이 노동 현장에 지친 몸을 편하게 있는 공간으로서 건축, 역행보살을 자처한 황임규 작가의 전언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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