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리 초대전
이안리 초대전
  • 박미애 취재국장
  • 승인 2018.06.1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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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6.16~30일

오프닝: 16일 토요일 5시

주소:인천시 중구 경동58번지

(참외전로142-41) 잇다스페이스

연락처: 010.7373.3834_010.9927.0777

 

 

 

 

 


우연이 필연이 되는 찰라의 순간들

 

이선영(미술평론가)

 

하얀 종이 위에 빠르게 그은 선으로 이루어지는 이안 리(Ian Lee)의 작품은 언뜻 동양화의 필획. 또는 그러한 필획들을 추상화시킨 그림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먹과 여백을 상기시키는 흑백의 대조, 그리고 절도 있는 흔적이 만들어내는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종이는 달력 따위를 인쇄하는 미끌거리는 아트지이며, 붓 대신에 사용된 것은 손이나 손바닥이다. 지문이나 손톱이 닳을 뿐, 붓이 닳을 일은 없다. 인쇄용 종이는 물론 먹물도 그리 비쌀 일이 없으니, 재료비가 많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재료비가 곧장 작품 가격이 되곤 하는 키치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다른 차원이 첨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값비싼 종이나 캔버스 위를 훈련된 붓질로 점유하는 특정 대상에 대한 아우라는 대단하다. 그러한 화면에 찍힌 작은 점이나 흐릿하게 흐르는 자국만으로도 화가의 정신성을 운운하는데 무리가 없다.

물감이 닿는 표면은 물론 프레임이나 뒷면, 그것이 걸리는 벽면까지 낱낱이 미학화 되어 있기에, 그림으로서의 물질성을 초월하고 단번에 정신적 공간으로 도약하곤 한다. 동양화 혹은 서양화라고 불리는 그러한 작품들은 작가가 도착하기도 전에 너무 많은 기성관념들이 미리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기성의 체계가 지배하는 그런 곳에서는 도약과 파격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힘들다. 오염되지 않는 최초의 순간은 특히 예술에서 꿈꿔지지만, 인간 자체가 백지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 걸림돌이다. 이안 리의 작품은 파도가 휩쓸어 가면 곧 지워질 모래 위에 그어진 낙서 같은 소박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매끈한 빈 종이위에서 먹물을 윤활유 삼아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그의 작품은 파도나 바람이 매번 지워주기에 매번 깨끗해지는 빈 판에서 또다시 놀이를 시작하는 듯한 홀가분함이 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유 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었던 무위의 행위들은 무한한 몰입을 낳는 놀이 그 자체이며, 그러한 행위가 무엇을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재능과 운 등, 예술의 필요조건은 꽤 많지만, 예술의 충분조건 하나를 꼽으라면 몰입이라고 말하고 싶다. 몰입이 없다면 예술은 노동에 불과하다. 몰입을 낳는 노동은 예술이 될 수 있다. 몰입만이 예술 특유의 도약을 낳는다, 무위의 놀이는 현실의 예술 제도라는 방해물 없이 예술의 진면목과 닿아있는 부분이지만, 그것을 자기만의 놀이를 넘어서 타자와 만날 수 있는 인터페이스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타자(최소한 자기 안의 타자)와의 소통이기 때문이다. 마침 생애 첫 개인전이 외국에서 열릴 예정인 이안 리는 자신의 놀이를 타자와의 놀이로 고양시킬 중요한 기회를 잡았다. 그것은 행운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으로는 ‘평생을 꿈꿔왔고 준비해왔던’ 것이라는 점에서 필연이다. 운은 필연이라는 틀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 틀이 없다면 운은 운인지도 인식하기 힘들다. 그것들은 작업이라는 맥락이 아니면 모두 흘러가 버린다. 반면 필연만 있다면 무의미하다.

현대사회는 근대의 자연과학만큼이나 필연의 몫을 늘려간다. 그러나 그럼과 동시에 우연의 몫도 늘려간다. 꽉 짜여 진 체계적 질서에서 발생하는 우연은 대부분 재난이다. 그러나 예술에서 우연은 재난이 아니라, 색다름과 새로움을 낳는 행운으로 다가온다. 예술은 놀라운 막판 뒤집기가 일어나는 놀이다. 기본적으로 드로잉인 이안 리의 작업은 거창한 예술이 아니라, 소박한 놀이의 방식을 가진다. 이는 부친과 누님이 화가인 작가 집안에서 자랐고 늘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술가의 길을 억압할 수밖에 없었던 이전의 삶과 연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임박한 전시를 위해 근 몇 달간 토해내듯 그린 작품들은 그 간에 꼭꼭 눌러 두었던 에너지가 발산되는 장이다. 매순간 다르게 흐르는 몸과 정신의 에너지를 낱낱이 받아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그것들은 예술이 아니었으면, 그저 무상한 시공간 속에 흩어져 버렸을 형상들이다. 예술을 통해 무분별한 흐름은 미세하게 계열화되고, 반복은 차이가 된다.

100여장 씩 한꺼번에 주문해서 쌓아놓고 한 장 씩 사용하는 종이는 공장에서 생산 판매하는 사이즈를 기본 단위로 하여 한 장 또는 그 이상을 이어서 쓴다. 같은 크기와 형식의 종이들은 모듈 같은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선택은 엄지로 힘차고 빠르게 그어진 하나의 획이 단위가 되어 여러 형상으로 변주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그의 작품은 단순함을 바탕으로 복잡함을 구축해 나가는 방식이기에, 복잡한 덩어리 역시 그것을 이루었단 단위로 해체될 계기가 있다. 정자, 올챙이, 물고기, 원자, 혜성, 때로는 인간까지도 떠오르는 꼬리가 길게 빠지고 양쪽에 지느러미나 손, 또는 분출된 액체나 기체처럼 보이는 곁가지를 단 형상은 위조하기 힘든 개인의 필적을 가진다. 필적을 가늠하는 핵심은 무의식이다. 작품을 이루고 있는 원자적 단위에 대한 관심은 초기 작품에도 분명하여, 2000년대 초반의 작품에는 아크릴로 그린 형상을 오려서 조각처럼 세운 것이 있다. 홀로 설 수 있는 것만이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그 때의 작품을 보면 끝이 날카롭게 뽑힌 형태에 대한 관심도 여전하다. 그것은 흐름이라는 부드러운 과정 속에 내재된 예리함이다. 먹의 농도나 손의 완급조절에 의해 기본형상은 뭉개지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하고 겹겹이 중첩되기도 하면서 다양한 이미지가 파생된다. 오른 손 엄지로 긋는 선이 기본이기에, 빠른 유영을 떠올리는 그의 작품은 왼쪽 방향으로 헤엄쳐 나아가는 듯한 형태가 많이 발견된다, 물속 공기가 부족한 듯 수면 아래로 꼬리를 빼고 있는 듯한 형상도 있다. 그러나 단위가 복잡하게 집적될수록 방향은 가늠할 수 없다. 밀도가 높을수록 구성인자들은 더 많이 부딪히고 더 큰 소음과 열기를 자아낼 것이다. 그 과정들이 가속되면 그것들은 끝내 서로를 상쇄시켜 균일한 밀도와 침묵으로 귀결될 것이다. 멀리서 보면 회색 원이나 사각형으로 보일 수 있을 만큼 흑백이 균일한 밀도로 채워진 작품들이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들조차도 외곽부분을 여백을 남겨놓아 형상을 가운데에 놓는 방식을 고수한다.

이안 리의 작품에서 대개 형상들은 동양화의 여백같이 비워둔 바탕을 배경으로 중간에 떠 있어, 중력을 초월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무의식이나 꿈처럼 붕 떠있다. 무의식이나 꿈이 현실에서 나온 것이지만 현실 그 자체는 아니듯, 예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닥에 종이를 깔고 빙빙 돌아가며 작업을 하기에, 화면의 위아래는 확실하지 않다. 화면 가운데 둥글게 또는 사각형으로 밀집된 형상들이 그렇다.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아트지의 형태를 의식한 듯한 입자들의 배치도 눈에 띈다. 가장자리를 돌든가, 그 내부에서 대각선으로 가로 지르든가 한다. 그것은 측량이 아닌 벡터적인 공간을 강조한다. 그것은 체계보다는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밀도가 높아지면 넓은 곳을 한적하게 유영하는 분위기가 급변한다. 바글바글 모여 있거나 풀어헤쳐진 형상들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을 예시한다. 자연계에는 인력과 척력이 작용한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관계가 ‘다가가기, 멀어지기, 대항하기’로 나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여러 조합이 있을 수 있다.

이안 리의 작품에서는 어항이나 수족관 같은 좁은 생태계에서 격렬한 먹이다툼을 하는 듯 지글거리는 형태부터 얇은 진흙탕을 강하게 내리치는 소낙비 같은 모습까지, 요컨대 생물에서 무생물에 이르는 다양한 비유의 스케일이 있다. 좀 더 복잡한 외곽선 때문에 괴물 같이 보이는 형상들이 줄지어 어디론가 이동하기도 한다.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으로 좀 더 크게 문지른 형상들에는 좀 더 큰 덩어리인 몸의 형태들이 떠오른다. 유기적 덩어리 형태지만 엄지로 이루어진 미시적인 입자들 못지않은 속도감이 있다. 이 속도감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 명확한 외곽선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경계의 불분명함은 먹물의 번짐이나 물감의 흘러내림 같은 과정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동양화, 또는 서양화에서 많이 쓰이는 그런 방식은 그에게 오랜 인내를 요구하는 학습만큼이나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안 리의 방식은 속도, 즉 굳어지기도 전에 다음 과정이 덮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을 굳이 비유하자면 피부가 벗겨진 근육덩어리 같은 형태? 거기에는 고통 또는 열락으로 고동치는 살, 또는 날것의 이미지가 있다. 에너지가 들고나는 물질로서의 몸체는 끝없는 변신의 과정 중에 있다. 여기에도 바깥으로의 확산과 안으로의 수렴이라는 두 가지 방향성이 있다. 수렴은 질서를 향하고 확산은 자유를 향한다. 질서는 생명과 물질, 사회의 유지하는 힘이지만 억압적일 때도 있고, 무질서는 자유롭지만 혼돈과 죽음에 가까워질 수 있다. 엔트로피의 법칙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간다. 물리학에서 그 역은 불가능하다. 항상성과 자유라는 극점은 생명이든 예술이든 초월할 수 없는 두 가지 힘이다. 이안 리의 작품은 이 두 대조 항 사이를 빠른 속도로 오고간다. 이 속도감이 작품의 생명력을 고양시킨다. 그는 생명이 아니라 생명력을 표현한다. 그가 표현하는 생명은 어떤 구체적인 종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들은 동물인 듯 식물인 듯, 미생물인 듯 좀 더 큰 유기체인 듯 모호하다. 밀도의 차이는 비워둠과 꽉 참의 대조를, 강도의 차이는 부드러움과 강함의 대조를 낳는다. 풀이나 물고기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는 것은 그가 20년 넘게 자연 속에서 동식물 사진을 찍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진을 통해서 자연 속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 과정을 관찰해왔다. 그는 해질녘의 들녘에서 수많은 벌레와 풀잎을 봤다. 거기에는 멀리서는 안보이지만 변화무쌍한 생존의 역사가 있다. ‘...겨울이 되면 흡사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풀들이며 나뭇가지들이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져 물결처럼 출렁이는 것이 스산하게 느껴져 오히려 이른 아침의 서리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나서 자라고 소멸되는 과정에서 끝내 보여 지는 풍경은 거친 자연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려는 생명의 몸짓이 아닐까 싶다. 설령 그것이 멈춰진 주검이더라도 아름답다...’ (작업단상 중에서)

이안 리는 자신이 만났던 것을 그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하나 기억하여 재현하지는 않는다. 재현은 그동안 찍어온 사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오십이 넘도록 만났던 것들이 잠재의식 속에 차곡차곡 쟁여져 있다가 불현 듯 꺼내지는 것은 직관을 통해서다. 그는 작품의 의도와 목적 보다는 작업과정을 통해 생성된 것과 만나길 원한다. ‘배를 타고 출발해서 멈추고 싶을 때 멈추며, 그 때의 풍경이 만족스러우면 되는 것’이다. 작품이란 자신이 시작해서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만난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점철된 불확실한 과정이다. 불확실함은 불안도 주지만 설렘도 준다. 이안 리의 작품에서 물질과 정신을 포함하는 자연은 외형이기 보다는 운동하는 과정이다.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과정이 찰라의 순간이 종이에 고착된 것일 뿐이다. 그것은 또 다른 움직임을 예기한다. 잠재적인 운동감으로 충전된 작품에는 열기가 감지된다.

제작과정도 마찬가지여서, 무릎에 바닥을 대고 기어 다니며 작업하다가 너무 몰두한 나머지 무릎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열로 대변되는 에너지는 안정된 체계를 거부한다. 붕 뜬 상태의 입자들이 이합집산 하는 이안 리의 작품은 중력까지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바닥에서부터 자라난 듯한 형상의 경우 종이 면을 재구성하여 방향감각을 다시 교란시키곤 한다. 필립 볼은 에서, 열을 서로 충돌하고 있는 원자들의 무질서한 운동이라고 인용한다. 열은 운동의 결과이다. 변화의 과학인 열역학은 증기기관의 움직임에서 모든 생물의 운명까지, 엔진부터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까지 관통하는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 느슨하게 또는 격렬하게 운동하는 입자들이 떠오르는 이안 리의 작품은 평형 상태 보다는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상전이(phase transition)의 순간들이 더 많다.

어떤 작품이든 구성 요소는 같지만, 배열의 상태가 다르다. 어떤 것은 기체처럼 분자들이 서로 독립적이고 무작위적으로 날아다니고, 어떤 것은 고체처럼 조직적으로 배열되어서 움직이지 못한다. 액체에서는 모여든 군중의 경우처럼 서로 밀치면서 돌아다닌다. 필립 볼에 의하면 갑작스러운 상전이가 나타나는 전환점이 임계 온도이다, 상전이의 핵심은 계 전체를 통해서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것은 수많은 구성입자들 사이의 협력 때문이다. 상전이는 수많은 구성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거동의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변화이다. 상전이는 입자에 작용하는 어떤 전반적인 영향이 어떤 문턱 값을 넘어설 때 일어난다. 갑자기 모든 입자들이 서로 연결된 정교한 네트워크를 통해서 다른 모든 입자들과 연결된다. 생명과 물리를 관통하는 이러한 전이의 순간은 예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예술의 유동성도 설명해주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에서, 이러한 유동성에서 붕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돌파를 본다. 돌파에 대한 이미지로 부각된 21세기의 키워드가 유목과 탈주다. 유목과 탈주는 속도감의 차이일 뿐 방식은 같다. 그것은 코드화 체계를 피해가거나 관통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터너의 예를 드는데, 거기에는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그리고 영원한 미래로부터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혹은 영원한 미래에로 도약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본다. 터너의 그림 못지않게 지글거리는 이안 리의 작품에도 그러한 끝없는 흐름과 요동이 있다. 그것은 ‘전진하고 있는 한 그리고 전진하는 그 만큼 언제나 이미 성취되는’(들뢰즈와 가타리)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이루어지는 바탕은 매끄럽다. 이안 리가 주로 사용하는 전지 사이즈의 아트지는 스며들지 않아서 속도감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에서 탈주가 일어날 수 있는 ‘매끈한 공간’--저자들은 이러한 공간이 적용된 예로 폴록을 든다--을 개념화한 바 있다.

매끈한 공간은 재현이 아닌 변신의 공간을 말한다. 재현은 수직/수평의 좌표계와 중심을 상정하곤 한다. 에서 재현이 직물과 비교된다면, 변신은 펠트와 비교된다. 직물과 달리 펠트는 무한하며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어 한계를 갖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직물과 펠트는 구별되는 사고와 실천을 대변한다. 직물처럼 균질하게 짜여 진 공간은 선이나 궤적이 점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즉 한 점에서 또 다른 점으로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펠트처럼 매끈한 공간에서는 정반대로 된다. 즉 점이 궤적에 종속된다. 짜여 진 공간에서는 형식들이 하나의 질료를 조직하는데 반해, 매끈한 공간에서는 재료들이 힘들을 지시하든가 아니면 힘들의 징후 노릇을 한다. 매끈한 공간은 측량이나 거리에 의존하는 외연적 공간이 아니라, 강렬한 내포적 공간이다. 매끈한 공간의 원형은 바다이다. 원자나 세포에도 바다 같은 공간이 있다. 그 공간들은 흐름과 흐르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안 리의 작품은 그러한 자연의 원리가 그림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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