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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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7.31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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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최가람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일하다 지쳐서 멍하게 될 때 문득 사진을 처음 접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고 답하겠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사진의 첫 만남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을 넘어,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맞이한 극히 강렬한 경험이었다. 글의 단어로나, 어느, 어떠한 영상으로도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뇌와 심장, 그리고 온몸의 뉴런을 비롯한 신경세포가 강한 자극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진(가족사진이나 여행사진 등)이 아닌 무언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요동쳐오는 강렬한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맥락적인 흐름들이 마치 살아있는 강물, 살아있는 바다의 파도와 같이 보여졌다.

 

 

그후 십년, 그리고 일년 더 지난 지금도 배우고 들은 만큼, 그리고 실제로 경험한 만큼 더불어 그 인상이 보다 깊이 있게 또는 강하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다른 이들도 자신과 비슷한, 다르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경험한 이들이 많을까?’

 

 

스스로 묻고는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다. 입도 굳게 닫히고, 머리 속에서도 어떤 단어도 나타내지 않고서…

 

 

하긴, 다른 이들에게 물어봐야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쉽사리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알 수는 없을 것으로 여긴다. 각자가 생각하는 ‘시작’에 대한 인상은 저마다 다를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드는 생각은 ‘왜 사진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한편으로는 공통되는 요소, 즉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물론 그 ‘시작’이라는 출발 선상에 있는 이들은 비슷하거나 같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작 이후’의 과정 속에서 중도하차하거나 저마다 다른 분야로의 진로를 선택하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필자는 나중의 후학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욕구에 이것저것 다양한 분야들을 접하면서 체험하고 익혀왔다. 그리고 나아가 실제 전문분야에서 인턴쉽을 거치고 혹독한 훈련과정과 잦은 실수를 범하면서도 끝까지 사진이라는 자신의 분야를 놓지 않고자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접하고 1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필자와 같이 사진을 자신의 주업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 ‘이대로 나는 괜찮을까?’

 

 

주변을 둘러보면 현재까지 사진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사진직업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좁아지는 영역에 슬퍼하거나, 때론 화를 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분야로의 전직을 꾀하면서, 저마다 자신의 살 길을 모색하지만, 사진에 대한 애정은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의지도 작용한 것이겠지만, 그만큼 오랜 시간을 사진을 주 생업으로 해온 이들에게는 본능적으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있다.

 

 

“ 요즘에는 세상이 너무 빠르고 쉽게 변하니 이 업계에서 오래한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벅차다. 조금만 좀 더디게 가면 좋으련만, 조금 더 천천히 바뀌어도 늦지 않는데, 참.. 야속하게도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인지라. 좀 더 진지하게 남보다 심도 있게 공부하고 실력을 갈고 닦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젊은 이들이라면 그래도 도망갈 타이밍이라도 있지..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은 늙은 이에겐…”

 

 

물론 지금의 변화들을 기회로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많지만, 전통적인 사진을 고집하고, 보다 진지하게 사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기 그지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어떠할까?’

 

 

필자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사실 몇 번을 묻고, 고민해도 답은 절대 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그 누가 예견해서 미리미리 대처를 할 수 있을까?

 

 

오직 다가온 상황에 따라 일일히 대응하며, ‘최선’의 선택을 하고, ‘최선’의 목표치를 위해 분발하고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그 뿐이다.

 

 

사실, 필자도 30대 초반인데, 돈 때문에 이리저리 직장을 옮겨다니며, 제대로된 경력이라 할 수 없는 기간, 업무 내용들 뿐인 결과만 낳았지만, 몇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첫 째로 자신에게 맞는 일이 있다는 것, 둘 째로 지금까지의 일들이 헛수고가 아닌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들어내는 ‘경험’이라는 소스라는 것, 셋 째로 이런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이다.

 

 

가끔 ‘이대로 괜찮을까’라는 질문은 바꿔 생각하면, ‘어디로, 어떻게, 무엇을 하면 좋을까’라는 질문과 같다.

 

 

‘시작’이라함은 늘 ‘끝’을 맺는 순간 찾아오고, 그 때 마다 스스로의 결단력을 요구하게 된다.

 

 

찾아온 ‘시작’은 다른 말로 표현할 때 ‘기회’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 앞에서 자주 망설이게 되지만, 망설일 틈도 없이 냉큼 잡고 달려들게 될 때도 있다. 그리고 만족이나 후회는 그 이후의 자가 진단 시에 하는 것임을 잠시 잊곤 한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망설이고, 걱정하고, 의심하게 된다. 눈 앞에 온 ‘기회’는 다시 올 수 없지만, 그 밖에 ‘기회’들이 찾아온다. 참 신기하게도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고, 앞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시작’ 앞에서 셈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단지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자신의 판단만이 요구되어질 뿐, 그 일을 하고 나서의 결과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한 번 해보고 난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음에도 안정적이고 보험이 잘 되어있는 일을 맡았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지금의 경기가 좋지 않고, 눈 앞의 목표가 돈이라 하더라도 단언컨데 원하는 결과를 취하기가 쉽지 않고, 안전함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실패할 수 있다.

 

 

‘시작’이라고 함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 ‘시작’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기도 한다. 결과에 대해 미리 운운할 필요는 없다. 미약한 결과일지라도 자기 스스로 만족한다면 그 또한 ‘결과’가 된다.

 

 

남의 시선, 세간, 상식을 운운할 필요도 없다. 생의 마지막 선상에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자신 단 하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입장에서는 조심스러운 것이 당연하겠지만, 좀 더 오랜 기간 일할 것을 감안한다면 좀 더 ‘시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시작’의 목적은 “자신의 생에 있어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을 위해 있는 자신의 “결정”이자, 그에 따라 취하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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